[회원] [이야기가 있는 후원] 만남은 힘이 세다

  • 날짜 : 2018-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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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왜 싸우는 걸까요?

‘사람들’이라는 주어를 쓰지 않는 것이 더 정직한 질문이겠네요.

 

나는 왜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내지 못하는 걸까요?

평화 활동을 하는 어린이어깨동무에서 일하는 저에게 스스로 던지는 질문입니다. 평화 캠프를 마치고 제 마음 깊은 곳에서 떠오른 질문입니다. 문득 마음을 사로잡는 미운 얼굴이 떠올라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이 글을 읽는 회원님들은 언제 평화롭지 못하신가요? 미워하는 누군가는 없으신가요.

 

만나면 평화, 못 만나면 미움

10년 넘는 세월 동안 서로의 얼굴을 외면하던 남과 북 지도자들이 서로 손을 잡았습니다. 아직 찬 기운이 남아 있는 4월에 만났던 두 사람은 그 후로도 두 번이나 더 만났습니다. 가을 문턱에 접어드는 9월, 함께 만나 밥도 먹고 공연도 보고 백두산에도 올랐습니다. 이제는 서로 얼싸안는 것도 자연스럽습니다.

그렇게 만남이 이어지니 둘 사이 단단했던 얼음이 녹습니다. 오해가 풀어지고 믿음이 쌓입니다. 뿔 달린 도깨비인줄 알았는데 만나 보니 나와 똑같은 피가 흐르는, 손이 따뜻한 사람입니다. 만나기 전에는 도대체 왜 저러는지 이해하기 도통 어려웠는데 이제는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이 많습니다.

만남이 없는 곳에서 오해가 싹틉니다. 함께 한 시간이 5천 년이 넘는다지만 떨어져 지낸 시간도 70년이 다가옵니다. 짧지 않은 세월입니다. 얼굴도 보지 못하고 소식도 막혀 지낸 날들이 쌓여가며 보통 사람들 마음에도 이해, 포용, 용서, 사랑, 포옹, 믿음보다 오해, 배제, 복수, 미움, 밀침, 불신이 또아리 틀었습니다.

그렇게 못 보는 사이 엉뚱한 소문과 왜곡만 남았습니다. 즐거웠던 기억, 빛나는 추억은 희미해지고 주변에서 떠드는 헐뜯는 악담만 요란합니다. 간간히 주어지는 만남의 자리가 예상과 달리 감동이 아닌 어색함으로 끝나는 경우가 왕왕 생기는 것이 그 때문입니다. 만남으로 극복하기에는 헤어져 미워한 세월이 너무 길기 때문이죠.



67년 만에 만난 아들

어린이어깨동무의 오랜 친구 조선금 회원님과 이금섬 할머님을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할머님은 올해 92세십니다. 전쟁통에 아들과 헤어져 67년이 지났습니다. 8월 20일에 금강산호텔에서 아들을 만났습니다. 남북 사이 훈풍이 불고 미움이 조금씩 걷히며 일어난 변화입니다. 북에 남겨진 그리운 얼굴을 보려고 200명 가까운 사람이 모였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이금섬 할머님이십니다.

아들을 만나러 가기 전에 주변에서 많이 들었던 말이 있습니다.

“진짜 아들이 아니고 가짜를 보낼 수도 있다. 그런 경우가 많다더라”
“만나면 돈이나 물건 많이 주지 마라. 위에서 다 빼앗아간다더라”
“만나서 반갑다고 아무 말이나 하면 큰 일 날 수 있으니 말조심해야 한다더라”

전부 어딘가에서 누군가에게 들은 카더라 통신입니다. 사실을 확인하기 어려운, 출처 없이 떠도는 말인데도 할머님 마음에 와서 콕 박혔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만난다는 설레임보다 의심과 두려움이 컸습니다. 진짜 아들이 아니면 어쩌나, 내가 아들을 잘 몰라 봐서 가짜를 진짜라고 착각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걱정들은 북에서 온 아들 리상철 씨를 만나는 순간, 봄볕에 눈이 녹아내리듯 사라졌습니다. 그냥 한 눈에 아들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젊은 엄마와 아가로 헤어졌는데 이제 엄마는 구순을 넘긴 할머니가 되었고 아들도 70을 바라보는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아들과 엄마 눈에 눈물이 맺혔습니다.



70 할아버지 되어서야 만난 네살박이 아들

헤어지던 날, 헤어지던 상황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갓난 여자 아기는 엄마가 업었습니다. 아빠는 네살박이 아들을 업었습니다. 그렇게 피난길에 올랐다 잠시 헤어졌을 때에는 이별이 반백년 넘게 이어지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총알이 오가는 밤이 지나고,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낮이 흘렀습니다. 갓난 아기가 안전하게 머물 곳을 찾아 거제도로, 부산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무슨 말로 그 고생을 표현할 수 있을까요? 참고 버텼지만 고통스러운 세월이었습니다.

할머님의 고향은 함경남도 갑산입니다. 지금은 량강도에 속하지만 당시에는 함경남도였죠. 산이 깊은 오지여서 조선 시대에는 유배지였을 정도입니다. 일제시대에도 항일 유격대가 마지막까지 활동했을 정도로 깊은 산골입니다. 그 깊은 곳에서 남으로 남으로 걷다가 거제도, 부산에 닿았습니다.

부산에서 고향 사람을 만났습니다. 할머님과 비슷한 처지였습니다. 부인과 헤어지고 남편과 헤어진 두 사람. 두 사람 모두 아이도 있고 만나야 하는 가족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동병상련의 마음을 나누며 지내다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서로 의지하여 어려운 처지를 이겨내고자 하는 마음이 컸습니다. 언젠가 길이 열리면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떨어져 헤어져 지내는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아들 둘과 딸 다섯을 낳았습니다. 북에서 데려온 딸을 편애한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일부러 모질게 엄하게 대했습니다. 맛난 것이 있으면 남에서 낳은 아이들에게 먼저 건넸습니다. 어느 손가락 하나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었습니다. 자식들은 장성하고 두 남편은 세상을 떴습니다.



만남과 대화가 이어질수록 오해는 옅어지고

다시 금강산입니다. 이산가족 상봉을 하기 전 하도 많은 말을 들었습니다. 북에 가면 조심할 것들이 많다며 겁을 주는 사람이 흔했습니다. 그런데 입경 심사장에서부터 편견이 조금씩 무너졌습니다. 남에서 온 손님들을 맞는 북녘 심사원들은 나긋나긋하고 친절했습니다. 남쪽의 안내자는 화장실을 참았다가 심사 마치고 가라고 했지만, 북쪽의 심사원이 당연하다는 듯이 화장실 먼저 다녀오라 했습니다.

별 것 아닌 일이지만 만남이 시작되니 오해와 편견이 힘을 잃기 시작합니다. 할아버지가 된 북녘의 아들은 며느리를 대동해서 나왔습니다. 싹싹하게 이금섬 할머님을 대하는 북쪽 며느리를 보며, 조선금 회원님의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대화가 거듭될수록, 만남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얼음이 녹고 훈풍이 불었습니다.

아들은 어머님을 위해 소박하지만 고운 선물을 들고 왔습니다. 손으로 짠 명주로 만든 침대보와 목도리, 술 세 병. 단촐하지만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투박한 디자인이라 반기지 않을 사람도 있겠지만 할머님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들의 손은 거칠어졌지만 선물로 받은 명주 침대보는 한 없이 부드러웠습니다.

공개된 장소에서 만남을 가진 후 가족끼리의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숙소에 함께 앉아 도시락을 먹었습니다. 이야기는 멈출 기미 없이 이어집니다. 아들이 북에서 살아온 인생 이야기, 북에 남겨졌던 남편 이야기, 아들의 자식들 이야기, 헤어진 친척들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옵니다. 울고 웃고 한숨도 쉬고 손을 만집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갈수록 헤어져야 하는 시간이 다가온다는 사실이 무겁게 느껴집니다.

다시 만날 수 있겠지?

이금섬 할머님은 아들을 만났습니다. 의심의 마음도 있었지만 보는 순간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금강산에 간 모든 사람들이 할머님 같았던 것은 아닙니다. 내 가족이 아니라고 말하며 상봉을 거부하고 자리를 뜬 사람도 있습니다. 헤어진 시간만큼 의심이 커졌습니다. 만나면 무조건 좋을 줄 알았는데, 상처가 더 깊어진 셈입니다.

상봉을 하고 후유증을 앓는 분도 많습니다. 꿈같은 3일이 훌쩍 지나면 다시 일상입니다. 기적처럼 다시 만났지만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기약 없는 헤어짐 앞에 몸과 맘이 무너집니다. 전쟁 때문에 헤어졌는데 화해하지 못해 다시 못 만나는 비극이 이어집니다.

다행히 좋은 소식도 들려옵니다. 남과 북 사이가 좋을 때만 이벤트처럼 만나는 것이 아니라, 헤어진 사람은 언제든 만날 수 있도록 상설 면회장을 만들겠다는 말이 나옵니다. 할머님이 손수 만들어주신 냉면 한 그릇을 먹고 길을 나섭니다. 귓가에 할머님 말씀이 쟁쟁합니다.

“꼭 한 번이라도 다시 만나고 싶어. 만나지 못하면 편지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어. 그렇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