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소식지 146호 '한반도 평화 톺아보기'에 게재되었습니다.
한반도에 드리운 데우스 엑스 마키나
정영철(어깨동무 평화교육센터 소장/서강대 교수)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쓰이는 기법의 하나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라는 것이 있다. 극의 극적인 전환이나 모든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버리는 무대 장치를 일컫는 말이다. 우리말로 하면 ‘만능의 보검’이라 할 것이며, 조금 조잡하게 말하면 과거 동네 시장에서 약장수들이 하던 ‘이 약을 한번 먹어봐’로 시작하는 ‘만병 통치약’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듯하다.
12월 3일, 2024년의 대한민국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그간 책으로만 그 사례를 확인했던 ‘친위 쿠데타’라 할 대통령의 ‘비상계엄령’ 발동이었다. 긴박했던 순간 국회를 중심으로 과반수 이상의 찬성을 통해 ‘계엄령’을 해제되었다. 누군가의 말처럼 십대에 경험했던 계엄을 오십을 훌쩍 넘긴 지금에 다시금 보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서울의 봄>이 영화관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언제든 재현될 수 있는 역사이자 동시에 현실임을 자각하게 해주었다. 인터넷상에서 <서울의 봄>을 패러디하여 실패한 ‘비상계엄령’에 대한 온갖 조롱이 등장한 것처럼, 생전 처음 이런 일을 겪었을 소위 MZ 세대에게도 놀랄 일이었을 것이다.
비상계엄이라는 단어는 그 단어에서부터 공포심을 유발한다. 계엄(戒嚴)이라는 단어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엄중하게 경계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누가 누구를 경계하는지는 역사가 보여주듯이, 대체로는 총을 든 자가 무장하지 않은 자에 대해 경계를 했던 것이 대부분이었다. 우리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계엄’은 곧 죽음과 공포와 거의 동일한 의미로 다가온다. 우리 역사의 총 12번의 ‘계엄’에서 대부분은 많은 희생자를 낳거나, 수많은 사람들이 감옥으로 때로는 삼청교육대라는 살벌한 곳으로 끌려가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 결과는 우리의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후퇴시켜왔다. 이번의 ‘비상계엄’ 역시 그대로 진행되었다면 우리의 민주주의는 지독한 고통과 후퇴를 경험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비상계엄을 좌절시키고, 그 주도자들에게 죄를 묻고 있는 지금은 오히려 우리의 민주주의를 한발 더 전진시키는 충분한 자양분이 되리라 믿는다.
그런데 이번 비상계엄의 사태를 다른 방향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지난 역사가 그래왔듯이 이번 12월 3일 밤 10시 30분에 발표된 대통령의 선언에서 그 명분으로 삼고 있는 표현에서도 반복되는 표현이 있다. 바로 ‘북한 공산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라는 대목이다. 우리의 계엄 역사는 항상 그래왔다. 즉, 계엄의 명분으로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그리고 쿠데타의 과정에서도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것은 바로 ‘북한’이라는 두 글자였다. 그리고 과거 마지막 계엄이 선포되었던 1980년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그 누구도 이 두 글자 앞에서는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했다. 또 하나 눈에 띄는 지점이 있다. 계엄군으로 동원되었던 육군 특수부대 707 특임부대에 하달된 명령이다. 바로 ‘북한 상황 심각, 움직일 필요’ 등의 문구이다. 국방장관의 명령이라고 하달된 내용에도 등장하는 것이 바로 ‘북한’이라는 두 글자이다. 역사적으로도 그래왔고, 지금도 반복되는 공통되는 단어를 꼽자면 바로 ‘북한’이라는 두 글자인 것이다. 우리 한국사회에서 쿠데타이건, 계엄이건 그 명분으로 동원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바로 ‘북한’인 것이다.
국민들의 ‘안보’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자극하고, 이를 자양분으로 삼아 자신들의 기득권과 국민들에 대한 위협을 얻는 최상의 정당성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듯이 ‘북한’이라는 두 글자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우리 사회가 ‘분단’의 심리적 공포와 불안, ‘북한’과의 적대와 갈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을 말해주는 것이자, 동시에 아직도 ‘분단’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우리 사회의 자화상의 한 단면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북한’의 위협을 구실로 계엄과 쿠데타를 시도하면서, 정작 자리를 지키고 위기의 순간에 ‘적 북한’에 대항해 싸워야 할 군인들을 불법적으로 이동시키는 것이 더욱 큰 안보의 위기를 자초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면, ‘북한’의 위협을 구실로 계엄과 쿠데타의 명분을 얻는 것은 그 자체가 심각한 모순이다. 그럼에도 앞서 말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이러한 모순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만병의 통치약’으로 만들어버리는 것 또한 ‘북한’이라는 두 글자인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온갖 모순을 ‘하늘에서 무대로 내려온 신’을 통해 해결하는 것이었다. 그 자체가 모순임에도 이 모순을 아무런 저항없이 해결해주는 것이 바로 ‘북한’이었고, 지금도 그렇게 동원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더 성숙해져야 할 이유는 수도 없이 많다. 더 이상 ‘분단’과 ‘북한’을 들먹이면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일이 더 이상 명분도 정당성과 설득력도 없어지게 만들어야 하는 것도 그 핵심이유의 하나라 할 것이다. 입으로는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겠다고 하면서, 정작 두 손으로는 국민을 향해 총구를 겨누는 역사가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도 이 땅의 민주주의가 더 성숙해야 하고, 한반도의 평화가 더 공고해져야 하며, 남북의 평화로운 공존에 대한 사회적 토대가 더욱 튼튼해져야 할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번의 계엄사태가 주는 교훈은 바로 우리 사회 한 켠에 단단히 뿌리를 박고 있는 ‘분단’을 향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무대로 내려온 신)를 하루빨리 극복하는 것이 민주주의 발전의 핵심과제라는 것이다. 더욱이 국회 계엄해제 결의안이 통과되고, 부대로 복귀하는 젊은 군인이 시민을 향해 죄송하다며 연신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서, 다시는 이 땅에 ‘분단’과 ‘북한’이라는 두 글자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우리의 젊은이들을 고통으로 내몰게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절실하게 느끼게 하였다.
냉전이 끝나고, 21세기가 벌써 4반세기를 지나고 있는 지금, 그리고 내년이면 분단 80년을 맞이하는 지금, 추위의 한복판에서 민주주의와 평화를 위해 싸우는 이 땅의 모든 이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매서운 겨울 추위를 이겨내면, 따뜻한 봄이 온다는 희망으로...

* 이 글은 소식지 146호 '한반도 평화 톺아보기'에 게재되었습니다.
한반도에 드리운 데우스 엑스 마키나
정영철(어깨동무 평화교육센터 소장/서강대 교수)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쓰이는 기법의 하나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라는 것이 있다. 극의 극적인 전환이나 모든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버리는 무대 장치를 일컫는 말이다. 우리말로 하면 ‘만능의 보검’이라 할 것이며, 조금 조잡하게 말하면 과거 동네 시장에서 약장수들이 하던 ‘이 약을 한번 먹어봐’로 시작하는 ‘만병 통치약’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듯하다.
12월 3일, 2024년의 대한민국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그간 책으로만 그 사례를 확인했던 ‘친위 쿠데타’라 할 대통령의 ‘비상계엄령’ 발동이었다. 긴박했던 순간 국회를 중심으로 과반수 이상의 찬성을 통해 ‘계엄령’을 해제되었다. 누군가의 말처럼 십대에 경험했던 계엄을 오십을 훌쩍 넘긴 지금에 다시금 보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서울의 봄>이 영화관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언제든 재현될 수 있는 역사이자 동시에 현실임을 자각하게 해주었다. 인터넷상에서 <서울의 봄>을 패러디하여 실패한 ‘비상계엄령’에 대한 온갖 조롱이 등장한 것처럼, 생전 처음 이런 일을 겪었을 소위 MZ 세대에게도 놀랄 일이었을 것이다.
비상계엄이라는 단어는 그 단어에서부터 공포심을 유발한다. 계엄(戒嚴)이라는 단어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엄중하게 경계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누가 누구를 경계하는지는 역사가 보여주듯이, 대체로는 총을 든 자가 무장하지 않은 자에 대해 경계를 했던 것이 대부분이었다. 우리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계엄’은 곧 죽음과 공포와 거의 동일한 의미로 다가온다. 우리 역사의 총 12번의 ‘계엄’에서 대부분은 많은 희생자를 낳거나, 수많은 사람들이 감옥으로 때로는 삼청교육대라는 살벌한 곳으로 끌려가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 결과는 우리의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후퇴시켜왔다. 이번의 ‘비상계엄’ 역시 그대로 진행되었다면 우리의 민주주의는 지독한 고통과 후퇴를 경험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비상계엄을 좌절시키고, 그 주도자들에게 죄를 묻고 있는 지금은 오히려 우리의 민주주의를 한발 더 전진시키는 충분한 자양분이 되리라 믿는다.
그런데 이번 비상계엄의 사태를 다른 방향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지난 역사가 그래왔듯이 이번 12월 3일 밤 10시 30분에 발표된 대통령의 선언에서 그 명분으로 삼고 있는 표현에서도 반복되는 표현이 있다. 바로 ‘북한 공산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라는 대목이다. 우리의 계엄 역사는 항상 그래왔다. 즉, 계엄의 명분으로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그리고 쿠데타의 과정에서도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것은 바로 ‘북한’이라는 두 글자였다. 그리고 과거 마지막 계엄이 선포되었던 1980년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그 누구도 이 두 글자 앞에서는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했다. 또 하나 눈에 띄는 지점이 있다. 계엄군으로 동원되었던 육군 특수부대 707 특임부대에 하달된 명령이다. 바로 ‘북한 상황 심각, 움직일 필요’ 등의 문구이다. 국방장관의 명령이라고 하달된 내용에도 등장하는 것이 바로 ‘북한’이라는 두 글자이다. 역사적으로도 그래왔고, 지금도 반복되는 공통되는 단어를 꼽자면 바로 ‘북한’이라는 두 글자인 것이다. 우리 한국사회에서 쿠데타이건, 계엄이건 그 명분으로 동원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바로 ‘북한’인 것이다.
국민들의 ‘안보’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자극하고, 이를 자양분으로 삼아 자신들의 기득권과 국민들에 대한 위협을 얻는 최상의 정당성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듯이 ‘북한’이라는 두 글자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우리 사회가 ‘분단’의 심리적 공포와 불안, ‘북한’과의 적대와 갈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을 말해주는 것이자, 동시에 아직도 ‘분단’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우리 사회의 자화상의 한 단면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북한’의 위협을 구실로 계엄과 쿠데타를 시도하면서, 정작 자리를 지키고 위기의 순간에 ‘적 북한’에 대항해 싸워야 할 군인들을 불법적으로 이동시키는 것이 더욱 큰 안보의 위기를 자초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면, ‘북한’의 위협을 구실로 계엄과 쿠데타의 명분을 얻는 것은 그 자체가 심각한 모순이다. 그럼에도 앞서 말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이러한 모순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만병의 통치약’으로 만들어버리는 것 또한 ‘북한’이라는 두 글자인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온갖 모순을 ‘하늘에서 무대로 내려온 신’을 통해 해결하는 것이었다. 그 자체가 모순임에도 이 모순을 아무런 저항없이 해결해주는 것이 바로 ‘북한’이었고, 지금도 그렇게 동원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더 성숙해져야 할 이유는 수도 없이 많다. 더 이상 ‘분단’과 ‘북한’을 들먹이면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일이 더 이상 명분도 정당성과 설득력도 없어지게 만들어야 하는 것도 그 핵심이유의 하나라 할 것이다. 입으로는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겠다고 하면서, 정작 두 손으로는 국민을 향해 총구를 겨누는 역사가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도 이 땅의 민주주의가 더 성숙해야 하고, 한반도의 평화가 더 공고해져야 하며, 남북의 평화로운 공존에 대한 사회적 토대가 더욱 튼튼해져야 할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번의 계엄사태가 주는 교훈은 바로 우리 사회 한 켠에 단단히 뿌리를 박고 있는 ‘분단’을 향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무대로 내려온 신)를 하루빨리 극복하는 것이 민주주의 발전의 핵심과제라는 것이다. 더욱이 국회 계엄해제 결의안이 통과되고, 부대로 복귀하는 젊은 군인이 시민을 향해 죄송하다며 연신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서, 다시는 이 땅에 ‘분단’과 ‘북한’이라는 두 글자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우리의 젊은이들을 고통으로 내몰게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절실하게 느끼게 하였다.
냉전이 끝나고, 21세기가 벌써 4반세기를 지나고 있는 지금, 그리고 내년이면 분단 80년을 맞이하는 지금, 추위의 한복판에서 민주주의와 평화를 위해 싸우는 이 땅의 모든 이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매서운 겨울 추위를 이겨내면, 따뜻한 봄이 온다는 희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