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공간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봄이라고 하기엔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는 5월 16일 아침, 서른 명이 넘는 참가자들이 동두천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습니다. 오늘 마주하게 될 역사를 생각하면 마음이 가볍지만은 않았지만, 화창한 날씨에 멀리 떠나는 버스 안의 분위기는 약간 들떠있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역사를 만나기 전, 잠깐의 예습을 하기로 합니다. 어깨동무 평화교육센터 정영철 소장이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게 된 역사, 한미관계와 관련 협정, 미국의 전략 변화에 따른 미군의 주둔 형태 변화 등 오늘의 피스로드를 이해하기 위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동두천에 도착해 최희신(경기북부평화시민행동 집행위원장) 강사님과 나라 활동가를 만나 첫 번째 방문지로 향합니다. 이동하는 길에도 주변에 보이는 건물 하나하나에 얽힌 이야기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여기 사람이 살고있다” 주한미군 공여지 반환운동 기념비
도착한 곳에는 촛불 모양의 돌에 ‘주한미군 공여지 반환운동 기념비’라고 새겨져 있었습니다. 강사님은 첫 번째 질문을 합니다. “공여지가 무엇일까요?” 공여지는 ‘대한민국이 주한미군의 사용을 위해 제공한 시설 및 구역’을 의미한다는 설명이 이어집니다. 공여지에는 임대료도 없고, 기한도 제한이 없다는 사실에 모두가 놀라는 사이, 더 놀라운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공여지의 범위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기지, 훈련장 등 눈에 보이는 시설 외에 미군 기지로 들어가는 송유관·수도관·전선 매설 지역과 철도까지를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설명을 듣다 보니 전 국토를 미군이 사용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넓은 공여지 중 왜 이곳에서 첫 번째 반환이 이루어지게 되었을까? 의문이 들었습니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한적한 시골길과 산이 보이는 것의 전부인 이곳에서 왜? 강사님의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어느 날, 주민들이 농사를 지으려고 밭에 가보니 낡은 탱크가 놓여있었습니다. 미군은 낡은 탱크를 폭격 훈련의 표적으로 사용한다고 합니다. 즉, 사람들이 농사짓는 밭을 표적으로 폭격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밭에서도 사람이 일하고, 인근 마을에는 사람이 살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때부터 마을 사람들을 중심으로 동두천 시민들은 훈련중단을 위한 모든 노력을 다하게 됩니다. 이들의 강력한 항의로 탱크는 잠시 돌아갔지만, 언제 다시 올지 몰라 사람들은 탱크를 막기 위해 돌을 쌓아 탱크 저지선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 모습이 우리나라 어디나 있는 소원탑과 같아서 그 바람이 더욱 간절하게 느껴졌습니다.

긴 싸움 끝에 결국 동두천 시민들은 그 일대 땅을 미군으로부터 반환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외침이 이기는 순간이자, 미군 공여지가 반환된 첫 사례였습니다. 이를 기념하는 것이 바로 처음 우리가 만난 기념비였습니다. 기념비는 원래 미군 장갑차에 치여 숨진 고(故) 신효순, 심미선 학생의 추모를 위해 준비되던 것이라 당시의 촛불집회를 의미하는 촛불 모양이라고 합니다. 미군에 의한 가슴 아픈 사건을 이곳에서 함께 기억하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2005년 이곳 ‘짐볼스 훈련장’이 반환된 이후로 전국 곳곳에서 시민들의 요구가 이어졌고, 공여지의 반환이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부대찌개와 양키시장
이번 피스로드의 점심 메뉴는 ‘부대찌개’였습니다. 미군이 주둔했던 지역이면 어김없이 먹었던 부대찌개. 먹을 것, 입을 것 뭐 하나 넉넉하지 않았던 전쟁 후의 대한민국에서 가장 물자가 풍족한 곳 중 하나였던 미군 부대에서 나온 햄과 소시지를 원료로 만든 부대찌개는 전쟁과 분단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음식이 아닐까 합니다. 이어서 양키시장도 둘러보았습니다. 이곳은 미군 개인 혹은 부대 매장을 통해 구입한 미군 보급품을 판매하는 곳으로 요즘에는 수입품이 많아져 예전만큼 활발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짧지만 미군 주둔지 문화를 직접 체험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슬프고 아프지만, 세상을 바꾼 사람들로 기억해 주길
‘기지촌’은 군 주둔지 주변에서 서비스업 중심의 생활권을 형성한 곳을 말합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주로 미군 주둔지 주변을 이야기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음식, 옷가지, 생활용품 등 다양한 서비스와 함께 클럽도 다수 존재합니다. 우리가 찾은 곳은 동두천의 캠프 케이씨와 캠프 모빌 주변에 형성된 보산동 기지촌이었습니다. 과거에는 개도 달러를 물고 다녔다고 할 정도로 번성했으나, 미군 병력이 평택으로 대다수 이전하고는 많이 한산한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미군들이 이용하는 클럽, 스포츠용품점, 전당포 등이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이곳의 과거와 현재를 기억하기 위해 ‘우리동네박물관’이 개관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보산동에서 우리는 1992년 주한미군에게 잔인하게 살해된 고(故) 윤금이씨가 살았던 곳과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고(故) 윤금이씨 사건 이전에도 폭행, 살인 등 주한미군의 범죄는 수없이 많았지만 ‘한미 주둔군 지위협정(SOFA)’에 따라 우리 정부가 수사, 재판, 처벌을 하지 못하고 미국으로 돌아가는 사례가 빈번했습니다. 또한 기물파손 등에 대한 경제적인 보상 또한 전혀 받지 못해 기지촌에서 살고 있던 한국인들은 지속적이고 막대한 피해를 감수하며 살았습니다. 이러던 중 발생한 고(故) 윤금이씨 살해사건에 동두천 시민들은 강한 분노와 깊은 슬픔에 잠기게 됩니다. 결국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항의 집회를 통해 한국 경찰의 수사를 요구했고, 사건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면서 살인 미군을 처음으로 한국 법정에 세우고, 한국 교도소에 수감하게 됩니다.
강사님은 고(故) 윤금이씨의 죽음이 너무 아프고 슬퍼서 기억해내는 것조차 힘들지만, 슬프고 아프게만 기억하지 말아 달라고 합니다. 고인의 죽음은 주한미군 범죄를 사람들에게 알리고 SOFA 개정을 이끌어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결국 세상을 바꾸었으니 ‘세상을 바꾼 사람’으로 기억하길 바란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를 기억하기 위해 고(故) 윤금이씨가 살던 집에 박물관을 건립할 계획이라고 했습니다. 덧붙여, 1992년 당시에 시민들의 적극적 움직임이 가능했던 것은 한국 사회가 87년 6월항쟁을 거치면 민주화되었기 때문이었다고 강조했습니다. 우리의 인권은 분단으로 인해 억압당했지만, 민주화로 회복될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분단사회를 사는 우리들에게 민주주의와 평화, 인권은 얼마나 깊게 연관된 것인지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옛 성병관리소, 분단·평화·인권을 이야기하는 기억공간으로 보존되어야
우리가 마지막으로 방문한 ‘옛 성병관리소’에서도 우리는 분단과 우리의 인권이 얼마나 깊게 연결되어있는지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전쟁 이후 가난하던 우리 사회의 수많은 여성들은 떠밀리듯 ‘기지촌 여성’이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2022년 대법원은 “정부의 기지촌 조성, 관리, 운영 및 성매매 정당화 및 조장 행위가 위법할 뿐 아니라, 인권존중의무를 위반한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임을 확인하며, 국가의 기지촌 피해 여성에 대한 배상 책임을 인정”했습니다. 대법원에서도 인정했듯 당시 정부는 미군에 대한 성매매를 조장하는 한편, 성병 확산을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전국에 성병진료소와 성병관리소를 설치했습니다. 이곳에서는 질환에 대한 치료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여성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성병 검진, 성병 의심 여성들에 대한 강제 수용, 페니실린 과다투여로 인한 장애발생・사망 등 다양한 종류의 인권유린이 자행되었습니다.
전국적으로 운영되었고, 경기도에만도 6곳이 운영되던 성병관리소가 폐쇄된 이후로 대부분의 건물은 자취를 감추었지만 동두천의 성병관리소는 토지와 건물의 소유주가 불일치하는 독특한 조건으로 인해 여전히 그 형태가 보존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2023년 동두천시가 관광지 개발을 위해 이곳을 철거할 계획을 발표했고, 시민단체의 보존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철거를 반대하는 시민들은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동두천의 역사, 평화인권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 과거를 기억하고자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찾아간 날은 동두천시의 기습적인 철거를 막기위해 농성을 시작한 지 627일 되는 날로, 이날도 오전, 오후, 야간 당번을 나누어 농성장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곳을 지키는 시민들은 철거하지 않고 기억하면서도 관광 인프라를 조성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더 많은 시민들의 관심과 연대로 역사의 아픔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기억함으로써 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결정이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이날 하루 동안 우리는 끊임없이 “사람과 공간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를 고민했습니다. 누군가는 슬프고 아프니 잊고 미래를 보자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의 진실을 기록하고 기억해야 평화와 인권이 성장하는 미래가 가능함을 역사를 통해 배웠습니다. 그 배움을 위해 피스로드는 앞으로도 계속 길을 떠납니다.
사람과 공간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봄이라고 하기엔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는 5월 16일 아침, 서른 명이 넘는 참가자들이 동두천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습니다. 오늘 마주하게 될 역사를 생각하면 마음이 가볍지만은 않았지만, 화창한 날씨에 멀리 떠나는 버스 안의 분위기는 약간 들떠있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역사를 만나기 전, 잠깐의 예습을 하기로 합니다. 어깨동무 평화교육센터 정영철 소장이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게 된 역사, 한미관계와 관련 협정, 미국의 전략 변화에 따른 미군의 주둔 형태 변화 등 오늘의 피스로드를 이해하기 위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동두천에 도착해 최희신(경기북부평화시민행동 집행위원장) 강사님과 나라 활동가를 만나 첫 번째 방문지로 향합니다. 이동하는 길에도 주변에 보이는 건물 하나하나에 얽힌 이야기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여기 사람이 살고있다” 주한미군 공여지 반환운동 기념비
도착한 곳에는 촛불 모양의 돌에 ‘주한미군 공여지 반환운동 기념비’라고 새겨져 있었습니다. 강사님은 첫 번째 질문을 합니다. “공여지가 무엇일까요?” 공여지는 ‘대한민국이 주한미군의 사용을 위해 제공한 시설 및 구역’을 의미한다는 설명이 이어집니다. 공여지에는 임대료도 없고, 기한도 제한이 없다는 사실에 모두가 놀라는 사이, 더 놀라운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공여지의 범위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기지, 훈련장 등 눈에 보이는 시설 외에 미군 기지로 들어가는 송유관·수도관·전선 매설 지역과 철도까지를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설명을 듣다 보니 전 국토를 미군이 사용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넓은 공여지 중 왜 이곳에서 첫 번째 반환이 이루어지게 되었을까? 의문이 들었습니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한적한 시골길과 산이 보이는 것의 전부인 이곳에서 왜? 강사님의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어느 날, 주민들이 농사를 지으려고 밭에 가보니 낡은 탱크가 놓여있었습니다. 미군은 낡은 탱크를 폭격 훈련의 표적으로 사용한다고 합니다. 즉, 사람들이 농사짓는 밭을 표적으로 폭격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밭에서도 사람이 일하고, 인근 마을에는 사람이 살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때부터 마을 사람들을 중심으로 동두천 시민들은 훈련중단을 위한 모든 노력을 다하게 됩니다. 이들의 강력한 항의로 탱크는 잠시 돌아갔지만, 언제 다시 올지 몰라 사람들은 탱크를 막기 위해 돌을 쌓아 탱크 저지선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 모습이 우리나라 어디나 있는 소원탑과 같아서 그 바람이 더욱 간절하게 느껴졌습니다.
긴 싸움 끝에 결국 동두천 시민들은 그 일대 땅을 미군으로부터 반환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외침이 이기는 순간이자, 미군 공여지가 반환된 첫 사례였습니다. 이를 기념하는 것이 바로 처음 우리가 만난 기념비였습니다. 기념비는 원래 미군 장갑차에 치여 숨진 고(故) 신효순, 심미선 학생의 추모를 위해 준비되던 것이라 당시의 촛불집회를 의미하는 촛불 모양이라고 합니다. 미군에 의한 가슴 아픈 사건을 이곳에서 함께 기억하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2005년 이곳 ‘짐볼스 훈련장’이 반환된 이후로 전국 곳곳에서 시민들의 요구가 이어졌고, 공여지의 반환이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부대찌개와 양키시장
이번 피스로드의 점심 메뉴는 ‘부대찌개’였습니다. 미군이 주둔했던 지역이면 어김없이 먹었던 부대찌개. 먹을 것, 입을 것 뭐 하나 넉넉하지 않았던 전쟁 후의 대한민국에서 가장 물자가 풍족한 곳 중 하나였던 미군 부대에서 나온 햄과 소시지를 원료로 만든 부대찌개는 전쟁과 분단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음식이 아닐까 합니다. 이어서 양키시장도 둘러보았습니다. 이곳은 미군 개인 혹은 부대 매장을 통해 구입한 미군 보급품을 판매하는 곳으로 요즘에는 수입품이 많아져 예전만큼 활발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짧지만 미군 주둔지 문화를 직접 체험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슬프고 아프지만, 세상을 바꾼 사람들로 기억해 주길
‘기지촌’은 군 주둔지 주변에서 서비스업 중심의 생활권을 형성한 곳을 말합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주로 미군 주둔지 주변을 이야기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음식, 옷가지, 생활용품 등 다양한 서비스와 함께 클럽도 다수 존재합니다. 우리가 찾은 곳은 동두천의 캠프 케이씨와 캠프 모빌 주변에 형성된 보산동 기지촌이었습니다. 과거에는 개도 달러를 물고 다녔다고 할 정도로 번성했으나, 미군 병력이 평택으로 대다수 이전하고는 많이 한산한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미군들이 이용하는 클럽, 스포츠용품점, 전당포 등이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이곳의 과거와 현재를 기억하기 위해 ‘우리동네박물관’이 개관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보산동에서 우리는 1992년 주한미군에게 잔인하게 살해된 고(故) 윤금이씨가 살았던 곳과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고(故) 윤금이씨 사건 이전에도 폭행, 살인 등 주한미군의 범죄는 수없이 많았지만 ‘한미 주둔군 지위협정(SOFA)’에 따라 우리 정부가 수사, 재판, 처벌을 하지 못하고 미국으로 돌아가는 사례가 빈번했습니다. 또한 기물파손 등에 대한 경제적인 보상 또한 전혀 받지 못해 기지촌에서 살고 있던 한국인들은 지속적이고 막대한 피해를 감수하며 살았습니다. 이러던 중 발생한 고(故) 윤금이씨 살해사건에 동두천 시민들은 강한 분노와 깊은 슬픔에 잠기게 됩니다. 결국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항의 집회를 통해 한국 경찰의 수사를 요구했고, 사건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면서 살인 미군을 처음으로 한국 법정에 세우고, 한국 교도소에 수감하게 됩니다.
강사님은 고(故) 윤금이씨의 죽음이 너무 아프고 슬퍼서 기억해내는 것조차 힘들지만, 슬프고 아프게만 기억하지 말아 달라고 합니다. 고인의 죽음은 주한미군 범죄를 사람들에게 알리고 SOFA 개정을 이끌어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결국 세상을 바꾸었으니 ‘세상을 바꾼 사람’으로 기억하길 바란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를 기억하기 위해 고(故) 윤금이씨가 살던 집에 박물관을 건립할 계획이라고 했습니다. 덧붙여, 1992년 당시에 시민들의 적극적 움직임이 가능했던 것은 한국 사회가 87년 6월항쟁을 거치면 민주화되었기 때문이었다고 강조했습니다. 우리의 인권은 분단으로 인해 억압당했지만, 민주화로 회복될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분단사회를 사는 우리들에게 민주주의와 평화, 인권은 얼마나 깊게 연관된 것인지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옛 성병관리소, 분단·평화·인권을 이야기하는 기억공간으로 보존되어야
우리가 마지막으로 방문한 ‘옛 성병관리소’에서도 우리는 분단과 우리의 인권이 얼마나 깊게 연결되어있는지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전쟁 이후 가난하던 우리 사회의 수많은 여성들은 떠밀리듯 ‘기지촌 여성’이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2022년 대법원은 “정부의 기지촌 조성, 관리, 운영 및 성매매 정당화 및 조장 행위가 위법할 뿐 아니라, 인권존중의무를 위반한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임을 확인하며, 국가의 기지촌 피해 여성에 대한 배상 책임을 인정”했습니다. 대법원에서도 인정했듯 당시 정부는 미군에 대한 성매매를 조장하는 한편, 성병 확산을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전국에 성병진료소와 성병관리소를 설치했습니다. 이곳에서는 질환에 대한 치료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여성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성병 검진, 성병 의심 여성들에 대한 강제 수용, 페니실린 과다투여로 인한 장애발생・사망 등 다양한 종류의 인권유린이 자행되었습니다.
전국적으로 운영되었고, 경기도에만도 6곳이 운영되던 성병관리소가 폐쇄된 이후로 대부분의 건물은 자취를 감추었지만 동두천의 성병관리소는 토지와 건물의 소유주가 불일치하는 독특한 조건으로 인해 여전히 그 형태가 보존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2023년 동두천시가 관광지 개발을 위해 이곳을 철거할 계획을 발표했고, 시민단체의 보존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철거를 반대하는 시민들은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동두천의 역사, 평화인권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 과거를 기억하고자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찾아간 날은 동두천시의 기습적인 철거를 막기위해 농성을 시작한 지 627일 되는 날로, 이날도 오전, 오후, 야간 당번을 나누어 농성장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곳을 지키는 시민들은 철거하지 않고 기억하면서도 관광 인프라를 조성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더 많은 시민들의 관심과 연대로 역사의 아픔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기억함으로써 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결정이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이날 하루 동안 우리는 끊임없이 “사람과 공간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를 고민했습니다. 누군가는 슬프고 아프니 잊고 미래를 보자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의 진실을 기록하고 기억해야 평화와 인권이 성장하는 미래가 가능함을 역사를 통해 배웠습니다. 그 배움을 위해 피스로드는 앞으로도 계속 길을 떠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