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자료<한겨레>“스무살 곧추세운 신념 따라 60년 함께 걸어온 ‘우리’ 대견하네”

1961년 서울대 정치학과 입학 동기

군대 시절도 같은 내무반에서 복무
‘동아일보’ 입사·해직 함께한 동지
동아투위 45돌 회견 영정으로 참가

[가신이의 발자취] 권근술 전 한겨레신문사 사장을 보내며


 

17일 오전 서울 광화문 동아일보사 앞에서 열린 ‘3·17 대량해직 규탄 45주년 기자회견’에서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왼쪽)이 고 권근술 동아투위 위원의 영정을 들고 참가한 손주 권민수(오른쪽)씨와 함께 했다. 사진 동아투위 제공
17일 오전 서울 광화문 동아일보사 앞에서 열린 ‘3·17 대량해직 규탄 45주년 기자회견’에서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왼쪽)이 고 권근술 동아투위 위원의 영정을 들고 참가한 손주 권민수(오른쪽)씨와 함께 했다. 사진 동아투위 제공

 

 

 1975년 3월17일, 우리가 함께 거리로 내쳐진 그날로부터 45주년인 2020년 3월17일, 한스러운 동아일보사 앞에서 다시 한풀이 모임이 있었네. 113명의 동아투위 위원 가운데 30번째로 세상을 등진 자네를 위한 추도의 글을 내가 읽었네. 끝내 해직기자의 딱지를 떼지 못한 채 지난 15일 떠난 친구 권근술을 위해서 말일세.

  

저 도도한 ‘동아·조선’의 건물은 여전히 서울 한복판에서 우람하게 우리를 압도하고 있었네. 45년 전 박정희 유신체제 아래서도 그랬듯이, 민주화되었다는 2020년에도 그대로, 아니 유신독재 때보다 더욱 기세등등하게 말일세1987년 민주항쟁으로 군사독재를 무너뜨리고, 이듬해 5월 우리의 비원, 국민주로 만든 <한겨레>가 탄생했을 때 우리는 얼마나 감격했던가. 식민지 치하의 민중이 모은 돈으로 세워졌다는 <동아일보>가 김성수 일가의 사유재산으로 둔갑한 것과 너무 대조되지 않던가. 그 동아일보사 사주와 박정희 군사독재의 합작으로 내쫓겼던 우리가, 그리고 조선투위 동지들과 80년 해직기자 후배들과 함께, 그 자유언론을 국민주로 우리 손으로 만들다니 어떻게 감격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한겨레> 창간 발기인으로 참가하고 편집위원장으로서 창간호를 받아들었던 그 순간 권근술, 자네는 얼마나 뿌듯했을까.

그러나 기울어진 운동장, 분단으로 까마득하게 높은 이념 장벽, 메뚜기 ‘이마빡’만한 남한을 시루떡 쪼개듯 갈라놓은 지역 분열, 이런 악조건을 앞에 둔 <한겨레>의 앞길은 다시 고난의 행군일 수밖에 없었지. ‘동아·조선’ 같은 기득권 언론이 사과나 반성은커녕 오히려 민주화의 과실을 가져가는 사태까지 이르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민주화, 자유언론이라는 명제를 지키면서 신문사 경영도 살려내는 과제를 권근술이라는 인물이 대표이사로 일하면서 실현시켰다고 평가하고 싶네. 4년 동안 대표이사를 맡는 동안, <한겨레>의 논조와 경영에 균형과 안정감을 확보함으로써 기틀을 잡도록 기여했네. 1998년 창간 10돌을 맞아 진보언론의 앞길을 다졌다고 평가받았을 때, 나름대로 보람을 느꼈을 것으로 보네.

 

친구를 보내면서 지난날을 되돌아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예의일세. 박정희 정권 초기, 유난히 학생운동의 주동자를 많이 배출한 서울 문리대 정치학과 61학번에서 권근술은 특출한 주동자로 ‘낙인’찍히지는 않았지만 지금도 ‘언니’라는 애칭으로 기억되고 있지. 동기생들의 온갖 치다꺼리를 도맡아 해준 자네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네. 미남형에 짙은 눈썹을 가진 자네의 첫인상은 ‘무슨 일을 저지를 것’만 같은 강한 분위기를 풍겼지만 사귈수록 부드럽고 상대방을 깊이 이해하는 성격은 친구들 누구나 호감을 갖도록 만들었지. 그렇게 어울리는 날들이 길어질수록 자신의 곧은 마음을 변함없이 어어가는 자세는 누구에게나 믿음을 주었지. 그래서 권근술 주변에는 항상 친구들이 모여들었네.

 

1960년대 초 정치학과 시절, 권근술의 용두동 집 문간방에서 시도 때도 없이 자고 먹고 기숙해보지 않은 친구들이 별로 없었지. 자네의 세 여동생은 그 오빠들 심부름하느라고 고생도 많이 했지.

 

동아일보 노조운동, 자유언론운동에서도 권근술은 맨 먼저 앞장선 적은 없었지만, 앞선 친구들이 모두 잘리고, 쓰러지고 나면 제2선의 선두에는 언제나 권근술이 있었지. 그의 주변에는 유복한 친구들이 많아, 동아투위 초기 해직당한 친구들이 생활고에 시달릴 때 그들의 구직 위해 발 벗고 나서기도 했지. 그렇지만 정작 그 자신은 어렵사리 출판사를 꾸리며 좁디좁은 사무실에서 밤을 새우며 <한국논쟁사>(전 5권) 같은 책을 만들어냈지.

 

1950년대 초 한국전쟁 때 부산에서 사대부속초등학교를 잠깐 다녔던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몇십년 지난 뒤까지 이름을 기억하는 거의 유일한 동창생이 바로 권근술 자네였다지? 어려서부터 권근술이 친구들에게 어떤 인상을 남겼는지 잘 말해주는 일화더구먼.

 

나야말로 권근술과 같은 해에 대학에 들어갔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군대에 가서 같은 내무반에서 복무하면서 칫솔 하나를 함께 쓰면서 지냈고 같은 신문사에 입사하여 노조운동, 자유언론운동을 함께 하다가 함께 해직당하기도 했네. 돌아보니 올해가 함께 걸어온 지 60년이 되었네.

 

여보게, 근술이. 우리가 잘못 살았나. 우리는 이룬 것이 없는가. 우리 스스로 대답하지 않기로 하지. 갈라진 나라에 태어나 자라면서, 젊은 시절 고민하면서 곧추세운 생각에 따라 한눈팔지 않고 살아온 우리 자신을 대견하게 생각하세.

 

근술이, 잘 가시게. 곧 뒤따라가겠네.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obituary/933039.html#csidx7641bc15485e8628188c50c7cda4b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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